Gun's blog

도덕의 계보 - 니체

도덕의 계보 - 금욕주의적 이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금욕주의(禁慾主義)는 정신에 속하는 것을 선(善)이라고 하며, 육체에 속하는 본능이나 욕구를 악의 근원, 또는 악 그 자체로 보는 견해에 바탕을 두어 육체적인 욕구·본능을 되도록 억제하는 것이 도덕에서는 본질적으로 중요하다는 관점이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금욕이나 고행(苦行), 그 자체도 선으로 보게 된다.

저자는 금욕주의적 이상을 설명하기 위해 예술을 이라는 매개체를 가져온다. 예술을 바라보는 관점을 두가지로 나누는데, 첫번째 관점은 예술은 그 자체만으로 완벽할 수 있다는 것이고, 두번째 관점은 예술은 관람자, 관찰자에 의해서 완성된다는 것이다. 물론 니체는 예술은 그 자체로서만 완벽할 수 있다는 관점이다. 여기에서 내가 물론이라고 말한 이유는 앞서 니체의 생각 그리고 글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니체는 진리, 도덕 등등 인간이 가치있게 여기는 것들에 대해서 그 가치가 그 자체에서 드러나는 것이지 누군가가 정해주기 때문에 가치있는 것이라고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니체는 금욕주의적 이상을 말한다. 니체의 말대로라면 금욕주의가 가치가 있으려면 금욕주의는 누군가에 의해서 평가되고 전통적인 것이 되면 안된다. 하지만 금욕주의는 자체만으로 가치가 탄생한 것이 아니라 전통과 역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진정한 가치라고 볼 수 없다.

이에 대해 저자는 좀 더 설명은 덧 붙이는데, 금욕주의적 이상은 가장 전통깊은 흐름을 보자면 단연코 성직자이다.

금욕주의적 성직자는 우리에게 병든 무리의 예정된 구원자, 목자, 변호인으로 생각된다. 고통받는 자를 지배하는 것이 그의 왕국이며 … (중략) … 그들과 더불어 이해하기 위해서, 그는 스스로 병들어야만 하며, 근본적으로 병자나 실패자와 밀접하게 관계해야만 한다.

즉 금욕주의적 성직자는 본인을 고통속에 몰아넣음으로써 아픈자, 병든자의 구원자를 자처하게 되고, 계속해서 병들어가며 그 속에서 지배하는 자이게 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모습이 성직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우리 누구에게나 인간 모두에게(니체는 물론 초인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이러한 모습이 내면 어딘가에 자리잡고 있다.

일상적으로 보아도 성욕, 식욕, 수면욕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그것을 많이 받아들이면 비인간적으로 바라보게되는 것은 인간에게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져 왔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우리의 내면 욕구를 참는 것을 선으로 보는 시각이 언제부터 생겨난 것일까?

니체의 말을 통해 그 흐름을 찾아보자

인간은 스스로를 변명하고, 설명하고, 긍정할 줄 몰랐다. 인간은 자신의 의미의 문제 때문에 괴로워했다. 인간이란 대체적으로 보아 병든 동물이었다. : 그러나 그의 문제는 고통 자체가 아니었고,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가?” 라는 물음의 외침에 대한 해답이 없다는 것이었다.

즉 인간이 가장 못 견뎌내 하는 것이 ‘무의미한 고통’ 인 것이다. 자신의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동물인데, 삶의 대부분이 행복보다는 고통이기 때문에 그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참지 못한것이다! 그러한 인간은 결국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게 됐고 그것이 금욕주의적 이상인 것이다.

인간은 그것에 의해 구출되었다.

이로 인해 인간은 금욕을 통해 선으로의 의욕을 갖게 될 수 있었고, 삶에의 의욕을 갖을 수 있었다. 의지 자체가 구출되었던 것이다. 인간 본연에 대한 증오, 관능에 대한, 동물적인 것에 대한 증오, 욕망자체에서 도망치려는 욕망 이러한 것들은 허무를 향한 의지이다.

인간은 아무것도 의욕하지 않는 것보다는 오히려 허무를 의욕하고자 한다…

우리는 어쩌면 금욕이라는 공통의 선을 만들어 그것을 지킴으로써 자기를 위로하고 그 이상의 것을 가치를 바라보지 못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의 흐름이 인간 역사서를 쓴 유발 하라리의 이야기처럼 사냥하는법(그 이상의 가치를 생각하는 법)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농사를 짓는것(고통으로 선을 찾는 것)을 경계해야 할 때가 온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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