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un's blog

타인의 고통

타인의 고통(수잔 손택) 9장

나는 저자가 말하는 고통의 분리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154p) 라고 말한다. 이 문장은 우리가 왜 그토록 많은 고통을 담고있는 사진, 동영상을 보고도 연민만을 느끼고,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지를 낱낱이 드러낸다. 이 사회의 많은 사회적 정치적 문제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성원들은 왜 적극적인 태도로 문제 해결책으로 고민하지 않고 싸우지 않는가? 나는 같은 맥락에 있다고 생각한다. 검찰 개혁, 코레일 노조 파업 등 우리 사회의 흔히 ‘청년’이라고 불리는 구성원이 자신의 고통 즉, 우리의 문제라고 느끼지 않는 순간 일종의 사진처럼 느껴지고 어떤 의미인줄 알지만 나와는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검찰 개혁의 문제보다는 오히려 조국의 딸이 좋은 교육 환경에 있다는 것에 기회의 불공정성을 느끼고 자신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문제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의 경우는 좀 더 이 상황이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간단하게 나의 배경을 얘기하자면 본가는 지방에 있고, 대학을 중퇴한 사람으로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나에게 가장 큰 문제로 다가오는 것은 어떻게 하면 나의 제한된 소득에서 지출을 줄이고 내가 살 수 있는 보금자리를 마련할 것인가 이다. 이렇게 되면 당연히 나의 입장에선 가장 긴밀하게 연결될 수 밖에 없는 문제가 청년 주거 문제이다. 특히 다음과 같은 경우에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는데, 지난 인문공화국 모임 시작 전에 스마트폰으로 집을 알아보고 있던 나에게 새청의 김정현님이 “또 집봐요? 건님은 제가 볼 때마다 집 보고 있는 것같아요" 라는 사실을 미루어 보자면 나, 확장해보자면 지방에서 올라온 청년들은 주거문제에 많은 리소스를 투여한다. (사실 이에 대한 근거는 sh의 2019년 1차 역세권 청년주택의 청년계증 공공임대 경쟁률이 240:1이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따라서 ‘타인'에 문제에 고민하기 보다 그 시간에 나의 문제에 대해 더 알아보고 고민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이 얼마나 ‘자신' 또는 ‘우리' 문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으면 자신과 연결되지 않은 ‘타인' 또는 ‘그들’의 문제에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타인의 문제와 고통에 능동적 태도를 취할 수 있는가? 저자는 그들의 고통과 우리가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또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두는 것이 그 가능성이라고 말한다.

이 연결성의 관점에서 보면 386세대와 이 시대 ‘청년'의 사회적 감수성에 괴리가 생길 수 밖에 없다고 느끼는 것이 독재 즉, 민주화가 되지 않은 상황을 겪은 세대와 그렇지 못한 세대간의 문제에 대한 연결성 차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관점으로 청년 세대가 페미니즘, 성 소수자에 대한 관심이나 고민이 많다는 것도 해석가능하다고 생각하는데, 과거에 비해 표현이 자유로워진 현재로서 자신 또는 주변사람이 소수자로 배제되는 고통을 가깝게 느끼다 보니 문제에 대한 깊은 상관성을 느끼면서 ‘우리’의 문제라고 느끼는 것 같다. 또 민주주의라는 단일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이 되고 사람들이 인식이 단일문제가 아닌 에코, 젠더, 취업, 난민 등 처럼 다양한 문제가 ‘우리'의 문제가 되다보니 ‘진보'라는 큰 틀로 묶이지 않고 각자의 문제에 집중한다는 특징도 두드러진다. 그렇다면 저자의 말처럼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 수 있다고 생각을 확장시키면 어떻게 될까? 코레일의 노조 파업을 우리의 비정규직 문제로 인식하고 깊은 관심을 갖는다면? 김용희 님의 파업과 노동자의 대한 인권을 우리 노동인권에 대한 연장선으로 인식한다면? 검찰 개혁이 검찰에 대한 권력 견제 기관이 없어 공정한 수사가 이루어지지 않고 결국 우리의 인권이 침해받는다면? 우리의 문제로 인식하는 순간 우리는 그 모든 문제들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타인'의 문제가 아닌 ‘나'의 문제일 것이니까. 따라서 우리의 과제는 이 사회의 문제를 우리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인식의 확장일 것이다. 그렇다면 마지막 질문이 남게된다. 만약 ‘우리’가 평생 느낄 수 없는 고통을 타인이 느끼고 있다면 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예로 남성이 여성인권에 대해 생물학적으로 달라 평생을 살아도 자신의 문제와 연결성을 느끼지 못한다면 이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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