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un's blog

인간의 조건

인간의 조건 발제문

아렌트가 정의하는 ‘공적'이라는 용어는 모두가 하나의 현상으로 지각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마음의 열정, 정신의 사유, 감각의 즐거움 조차도 공적 현상으로 인지되지 않는 한 불확실하고 비현실적인 존재로서의 삶을 영위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공적 영역에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 노예가 인격체보단 그림자와 같은 존재로 남은 이유다. 더욱이 최근에 들어서는 주관적 감정과 사적 느낌을 사람들이 강화시키고 있는데 이런 강화는 세계와 인간이 실재한다는 확신을 상실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만 가능하다고 언급한다. (아렌트는 고통을 언급하기도 하는데 ‘사람들 사이에서 존재함’을 의미하는 공적 의미의 삶과 죽음 사이의 한계 경험인 고통은 지극히 주관적인 경험이다.)


또 공론 영역에 있는 것은 빛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는 어조를 비치고 있는데, 이 때 공적인 빛을 견딜 수 있는 것만 공적 문제라는 것을 확실히 구분지음과 동시에 사랑을 예로 들며 사적인 것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이를 통해 어떤 영역의 경중을 따지기 보단 각각의 영역의 역할이 있음을 말해준다. 아렌트는 사람들이 근대를 지나 현대로 오면서 사적인 것에 매력적인 특징때문에 공론 영역이 삶에서 거의 사라졌다고 암시하면서 공론 영역이 위대한 시기는 있었지만 일상에서 매력을 느낄 순 없기 때문에 사라지고 있다고 얘기한다.

아렌트가 말하는 공적의 두번째 의미는 인공적인 사물의 세계를 말하는데, 이는 사람들을 맺어주기도 하고 분리시키기도 하는 역할을 한다. 이 때 현대의 사회가 사람들의 관계와 분리의 힘을 가지고 못하는 것에 대해 우리가 힘든 이유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느끼는 이 분리감을 결합시키는 것이 초기 기독교철학의 주된 정치적 과제였다고 얘기한다. 아렌트가 얘기하는 사랑은 사적인 것이기 때문에 초기의 기독교가 사랑의 원리만이 아닌 자비의 원리로 이야기 한것은 공론영역으로 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게 했다.

지금은 더이상 그렇지 않지만, 우리 이전 시대의 사람들은 수세기 동안, 단지 자신이 소유하거나 타인과 공유하는 어떤 것이 자신들의 현세적 삶보다 더 오래 영속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공론영역에 참여하였다. 근대에 들어와 공적인 정치영역이 소멸되었다는 사실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것은 불멸성에 대한 관심(concern)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아렌트는 애덤 스미스의 말을 빌려 공적 찬사와 돈을 통한 보상이 본질상 같다고 말하면서 공적 찬사와 배고픔, 돈을 비교한다. 배고픔은 인간의 음식에 대한 필요를 토대로 실재성을 갖는다. 이러한 원리로 금전적 보상이 공적 찬사보다 더욱 객관적이고 실재적인 것이 되었다고 아렌트는 말한다.

또 공동 세계의 조건은 사람의 공통적 본성이 아니라 다양한 입장과 관점이 유지되는 동시에 같은 대상에 관심을 갖는 것이라고 얘기하는데, 이런 공동 세계의 실재성이 사라지는 경우는 독재, 또는 대중사회의 조건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고 한다. 이 때 모든 사람은 가족의 구성원처럼 행동하고 주관성에 갇혀 완전히 사적으로 된다. 이를 통해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공포를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앞서 언급한 불멸성에 대한 관심의 부재, 공적 찬사의 불필요성, 공론 영역의 관련되지 않은 곳에서의 매력적이지 못함 때문에 현대로 올수록 공적 관심의 결여로 나타남을 보여준다. 그 중에서도 필요에 대한 실재성으로 인해 공적 영역의 가치와 찬사가 설 자리가 없어지는 것을 보면, 정신적 배부름을 잃어버린 현대인을 꿰뚫어본 존 스튜어트 밀의 말도 일리있어보인다.(배부른 돼지가 되느니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겠다)

아렌트는 사적 이라는 단어에 현실성, 관계의 박탈의 의미가 기독교의 등장과 함께 사라졌다고 말한다. 기독교의 도덕성은 자신의 일에만 관심을 가져야 하며, 정치적 책무는 신자의 행복과 구원을 위해 근심을 덜어줄 목적에서만 수행될 수 있다고 말한다. 흥미롭게도 사적이라는 말은 소유와 관련해서는 고대 정치철학의 관점조차 박탈적 성격을 갖지 않으며 공론 영역 일반과 대립하지 않는데, 소유는 사적 영역에 속하지만 언제나 정치적 조직체에 매우 중요한 것으로 생각되는 특성을 갖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소유와 부의 차이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데, 근대 이전에 소유는 신성함을 기반으로 이루어졌다. 반면에 부는 그렇지 않았다. 원래 소유는 한 가족의 가장이 되는 것 이었다. 소유한 세상의 한 부분은 이것을 소유한 가족과 완전히 동일한 것이어서 시민의 추방은 거처의 실질적 파괴를 의미했다. 노예와 외국인의 부는 이런 것을 대신할 수 없었다. 담과 법률의 비교를 통해 담은 생물학적 과정과 소유를 보호하는 경계, 법률은 공론 영역을 둘러싸서 보호하는 경계로 지칭하면서, 사적 소유는 공론 영역의 숨겨진 측면과 같다고 얘기한다. 도시국가의 발생과 더불어 사적 소유권은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되었는데, 소유주가 정치적 삶을 영위하는데 재산을 사용하지 않고 재산을 늘리려고만 한다면, 그는 자유를 희생하고 노예가 될 수 밖에 없는 존재라고 말한다. 프루동의 격언을 인용해 자본주의에 대한 부정적 시선을 비춤과 동시에 사적 소유권은 사회적 생산성의 발전을 방해할 뿐이라고 말한다.

사회가 처음으로 공론영역에 들어갔을 때 그것은 공동의 부를 위해 존재했다. 이 공동의 부가 공론 영역을 인수하게 되었을 때 세계의 지속성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자본의 주요 기능은 더 많은 자본의 증식인데 부는 이럴때만 영속성을 갖는다. 그러나 세계의 영속성과는 본질이 다르다. 부의 영속성은 구조의 영속성이라기보다 과정의 영속성이다. 부의 축적과정이 없다면 부는 사용과 소모를 통해 분해되는 반대의 과정으로 전락한다. 따라서 공동의 부는 우리가 말하는 공동의 것이 될 수 없다. 현대에 들어서는 모든 대체가능한 사물은 그것의 위치에 의해 결정되는 사용가치를 상실하고, 항상 변하는 교환가능성에 의해 결정되는 사회적 가치만을 획득한다. 이처럼 실재적인 것의 사회적 소멸은 마르크스가 말하는 노동력과 밀접하게 연관되는데, 이것은 소유는 고정되는 것이 아니며 인간 자신이라는 말과 같다. 아렌트는 고대에서 여자와 노예는 누군가의 소유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이 신체의 기능에 바쳐져 ‘근면했기'때문에 숨겨져야 했다고 얘기한다. 근대가 노동 계급과 여자를 역사적으로 동일한 순간에 해방시켰다는 사실은 신체의 기능과 물질적 관심을 더이상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시대의 특징으로 간주해야 한다. 우리의 문명에서조차 감추어져야하는 은밀한 것의 몇몇 잔재가 ‘신체의 본질'에서 필연적으로 기인된다는 사실은 다시 한 번 주목해 볼 만한 문제이다.

아렌트는 선함과 사유를 이야기 하는데, 선함은 본질적으로 누구도 목격하지 말아야 하며 무엇보다 그 자신도 알지 못해야 한다고 말한다. 철학자는 사유하는 자신에 의존할 수 있지만, 선함은 누구와도 동행할 수 없다. 선함은 기억되는 순간 파괴되며 행해진 순간 잊혀져야 한다. 이와 반대로 사상은 페이지나 책처럼 사물세계의 한 부분이 된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선은 홀로있음과 연결되고 이는 다원성이라는 인간조건과는 너무나 모순되서 신의 동행을 필요로 한다. 선은 공론 영역에서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은둔처에서 나와 공적 역할을 하고자 의도하는 선은 이제 더이상 선이 아니다. 마키아벨리는 교회가 이탈리아 정치를 타락시킨 이유는 교회가 세속사에 관여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선행이라는 극단적 예를 선택함으로써 아렌트는 정치적 공동체가 가지고 있던 판단기준들이 활동적 삶 각각의 본질과 일치한다는 사실과 활동적 삶의 정치적의미를 규정해보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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