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un's blog

인간의 조건 5장

인간의 조건 5장 행위

모든 행위자는 행위하는 한, 그 속에서 기쁨을 얻는다. ..(중략).. 자신의 잠재적 자아를 드러내 보이지 못하는 행위는 행위가 아니다. -단테

24장 말과 행위 속에서 드러나는 인격

우리는 말과 행위를 통해 인간세계에 참여한다. 참여는 시작을 의미하고, 시작이라는 것은 예측할 수 없다는 성격을 갖는다. 다시 돌아와 결국 행위라는 것은 예측할 수 없는 것으로 한 인간이 예상할 수 없는 것을 수행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행위가 시작과 상응한다면, 말은 사람들이라는 동일한 종 사이에 별개의 유일한 존재로 살아가게 하는 다원성과 상응한다. 이러한 특징들로 말과 행위는 다른 사람들과 구별됨을 만들어내고 결국 말과 행위는 “너는 누구인가"에 대답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된다. 그리고 이 말은 우리는 말과 행위를 통해서만 유일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과 같다. 사람들은 행위하고 말하면서 능동적으로 자신의 고유한 인격적 정체성을 드러낸다. 신체적 정체성과 달리 인격은 한 인간이 말하고 행위하는 모든 것을 통해 드러난다. 그러나 인격을 소유하고 처분할 수 없는 것처럼 인격은 의도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25장 인간사의 그물망과 그 속에서 나타나는 이야기들

어떤 인간을 묘사할 때 ‘성격'을 묘사하는 순간 그의 유일성은 사라진다. 인간의 유일성을 말할 땐 ‘인격'에 대해서만 인간은 유일해 질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인격을 단어로 구체화 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인간사를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 배제된다. 말과 행위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사람들 사이에 놓여 있는 사물세계에서 관심은 문자 그대로 존재-사이(inter-est), 즉 사람들 사이에 놓여 있는 어떤 것이며, 대부분의 말과 행위는 이 중간영역과 연관된다. 행위하고 말하는 주체의 현시는 모든 인간관계를 구성하는 요소이기 때문에, 행위의 의미와 거리가 먼 이해관계를 가진 물리적. 세계적 중간영역은 마치 전혀 다른 중간영역으로 덮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중간영역은 실천행위와 언어행위로 구성되어 있으며 우리는 이를 인간관계의 ‘그물망’이라 부른다. 유일하고 일회적인 ‘인격'를 구체적으로 표출할 수 있는 유일한 매체는 이야기다. 어떤 사람이 누구였고 누구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주인공인 이야기를 알 때에만 가능하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한줄의 글도, 한편의 작품도 남기지 않았지만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누구인지 안다. 같은 맥락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우리는 알지만 우리는 그가 누구인지보다는 소크라테스가 누구인지를 더 잘 아는 것이다. 행위자의 막연한 정체성은 그들의 행위를 모방함으로써만 전달할 수 있다. 주체의 정체성은 일반화될 수 없고 따라서 물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26장 인간사의 연약성

시작하는 자가 함께할 타인을 발견하기 이전의 출발지점에서는 혼자 주도하면서 고립되듯이, 통치자도 자신의 힘 때문에 혼자이며 타인에게서 고립된다. 통치자는 실제로 다수가 이룩한 업적을 자기 것이라 주장한다. 통치자는 다수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을 것이 분명함에도 이런 주장을 통해 이들의 힘을 독점한다. 그래서 특별한 힘의 환상이 생기고 이로 인해 혼자이기 때문에 강력하다는 강자의 오류가 생겨난다. 그러나 행위는 고립되어서는 불가능하다. 고립되는 것은 행위의 능력을 빼앗기는 것이다. 이는 통치자의 무능력함을 이야기 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하나의 행위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그 행위에 잇따르는 행동과 수고로 구성된다. 그 결과는 무한하다. 왜냐하면 행위의 모든 반작용은 연쇄작용이 되고 그 일련의 모든 과정이 앞서 얘기한 그물망의 매개체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 간의 행위와 그의 반작용은 특정한 공간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매우 제한된 환경에서 행해진 가장 사소한 행동도 행위의 특성때문에 무제한성의 씨앗을 품고 있다. 하나의 행위, 가끔은 한마디 말이 모든 사람들을 변화시키기에 충분하다.

27장 그리스인의 해결책

이야기 자체는 끝나야만 알 수 있고 실재하는 것으로 파악될 수 있다. 달리 말해 행위 주체의 본질은 생명이 떠나가거나 이야기 외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을 때에만 존재할 수 있다. 이러한 행위의 연약성을 그리스에선 폴리스의 구축으로 해결했다. 폴리스의 기능은 행위와 말의 무상함을 치료하는 것이었다. 행위가 망각되지 않고 ‘불멸적’인 것이 될 가능성은 희박했기 때문이다. 폴리스에서 함께하는 인간의 삶은 가장 무상한 인간활동인 행위와 말 그리고 가장 덧없는 인공적 ‘생산물’인 행위와 이야기들을 사라지지 않도록 보장한다. 정치 영역은 직접적인 공동 행위에서, 즉 ‘말과 행위의 공유'에서 발생한다. 폴리스는 지리적 위치를 가진 도시국가가 아니라, 사람들이 함께 행위하고 말함으로써 생겨나는 사람들의 조직이다. 즉 우리가 행위하고 말할때에도 이 곳은 폴리스인 것이다. 그리고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폴리스라는 공간은 항상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공간을 박탈당했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말하면, 실재를 박탈당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28장 권력과 현상의 공간

힘(strength)이 고립된 개인에게서 볼 수 있는 자연적 성질인 반면, 권력은 함께 행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나 그들이 흩어지는 순간 사라진다. 현상의 공간은 말과 행위의 방식으로 사람들이 함께 사는 곳이면 어디서나 존재한다. 작업의 공간과는 달리 이 공간은 사람들이 흩어지면 사라지고 활동 자체가 없어져도 사라진다. 사람들이 모이는 어디에서나 현상의 공간은 잠재적으로 존재하지만, 반드시 또는 영원히 존재하지는 않는다. 말과 행위가 일치하는 곳에서, 말이 공허하지 않고 행위가 야만적이지 않은 곳에서, 말이 의도를 숨기지 않고 행위가 현실을 드러내는 곳에서 권력(power)은 실현된다. 세력(force)은 한 사람이 홀로 동료에게 발휘하는 것이며, 폭력의 수단을 확보함으로써 한 사람 또는 소수가 그 독점권을 소유할 수 있다. 폭력이 권력을 파괴할 수는 있지만 권력의 대체물은 될 수 없다. 이로부터 세력과 무권력의 빈번한 정치적 결합이 발생한다. 이것은 무능한 세력들 간의 동맹이다. 역사적 경험과 전통적 이론에서 이 결합은 전제정치다. 이 지배형태에 대한 두려움은 전제정치가 통치자와 피지배자 모두에게 선고하는 무능과 무상함 때문에 생겨난다. 전제군주는 백성들로부터 고립되고, 백성들은 무언의 공포와 의심으로 서로에게서 고립된다. 행위는 고립되어선 존재하지 못하기 때문에, 전제정치는 다원성에 모순되며 결코 정부 형태 중의 하나가 될 수 없다. 한편 물질적으로 강한 통치자에 대항하는 인민의 항쟁은 저항할 수 없는 권력을 발생시킬 수 있다. 인민의 항쟁은 가장 능동적이고 효과적인 행위 방식이다. 왜냐하면 이 항쟁은 승자나 패자가 있는 전투로 막을 수 없고 오직 대량학살로만 저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승자조차 패자가 된다. 누구도 죽은 자를 지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명백한 것은 행위와 말의 가장 깊은 의미가 승리와 패배와 무관하고 최종의 성과에 영향을 받지 않으며, 결과가 좋든 나쁘든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행위는 오직 위대성의 기준으로만 판단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일상에서 참인 것은 적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고유하며 독특하기 때문이다. 동기와 목적은 아무리 순수하고 위대하다 해도 결코 유일한 것은 못 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심리학적 성질처럼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형적인 특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대성 또는 개별적 행위의 고유한 의미는 단지 행위의 실행 자체에 있지 그 동기나 결과에 있지는 않다.

ⓒ 2019. gun all rights reserved